두 시 계

카테고리 없음 2010. 7. 9. 11:30

두 시 계. 2AM MEETING.
아내가 가끔 모이는 모임 이름이다. 두 시 계라는 이름은 바로 나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모임만 했다하면 새벽 두 시나 되야 들어오니 내가 부아가 나서 한 마디 한 게 아예 모임 이름이 되어버렸다.
"야! 무슨 여자들이 이 시간까지 뭐하고 놀다오는 거야? 지금이 몇 시야? 두 시야 두 시. 새벽 두 시! 아예 두 시 계라고 하지 왜?"
라고 했다가 두 시 계가 되었다는 말씀.

아내에게 두 시 계가 있는 날은 특별히 일찍 퇴근하려고 노력한다. 엄마없이 아빠와 아이들이 유대를 돈독히 하는 귀중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서둘러 밥을 먹고 근처 중학교 운동장에 가서 한 시간여를 아이들과 뛰어 논다. 나도 나름 피곤한 직장인인지라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이 무척 힘이 들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우선 '아이들과 놀아준다'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시혜적 입장에서 아이와 놀아준다라고 생각하면 그 자체가 힘들고 따분하기 마련이다. 아이도 금방 안다. 아빠가 억지로 놀아주는지 아닌지. 두 번째로는 운동이다. 가뜩이나 잦은 야근과 술자리로(핑계일 뿐이지만^^) 운동할 시간과 기회가  부족한 게 샐러리맨이다. 아이와 놀면서 운동도 함께 하는 것이다. 윤호(내 아들, 6세)는 축구를 좋아한다. 아들과 같이 공을 차면서 일부러 많이 뛰어다닌다. 아들이 다른 아이와 놀 때도 멈추지 않고 뛰어 다닌다. 한 시간을 그러고 나면 진짜 운동이 된다.

그렇게 한 바탕 놀고 온통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아이들을 직접 씻기는 것도 중요한 과정이다. 봄(내 딸, 9세)이는 언제부터인가 씻겨 주는 것을 싫어한다. 여자이고, 이제 다 컸다는 것이지... 그런 걸 억지로 씻어 주려고 하면 안된다. 그래도 하나는 해야지 싶어 머리는 꼭 내가 말려 준다. 그런 식으로라도 스킨쉽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 아들은 아직 씻겨 줘야 한다. 대충 씻을 수도 있고 샴푸나 비누를 꼼꼼히 행구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제는 어쩐 일인지 화까지 내며 혼자 다 할 수 있다고 버티는 바람에 아들 씻기는 일은 면제되었다. 그런데 기분이 시원섭섭하더라.
신나게 놀고 씻은 후에도 아이들이 잘 자려들지 않는다. 더 놀고 싶은 마음에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왔다갔다 한다. 이럴 때는 집안의 모든 불을 끄고 아이들을 재워야한다. 아빠는 자지 않으면서 아이들에게만 자라고 하고 윽박지르면 하루 고생이 물거품이 된다. 안자겠다고 투정부리던 아이들도 정작 잠자리에 들면 금방 잠이 든다, 피곤하니까. 아이들이 울면서 잠들거나 불만이 있는 채로 잠들게 해서는 안된다. 울던 아이는 반드시 달래고 부모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평안한 기분이 든 상태로 잠들게 해야한다. 그래야 잘 자고, 아침에 잘 깬다.
아이들이 자면 빨래를 넌다. 아이들과 운동장에 가기 전 세탁 버튼을 눌러 두고 돌아와서 너는 것이다. 어제는 빨래 양이 많아 세탁기를 두 번 돌렸다. 비가 좀 오길래 관두려다가 그냥 했다. 이것은 정치적인 이유가 있다. 밤 늦도록 놀다 들어왔는데(늦는다고 전화하면 안되요!!) 남편이 밀린 청소와 빨래를 다 하고 아이들 옆에서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아내는 내가 굉장히 섹시해 보인다나... 거기에 하나 더. 아내의 '두 시 계'를 성공적으로 치루고 나면 나의 저녁 술자리에 대해 아내가 무척 관대해진다. 당분간이긴 하지만ㅋㅋ

생각해보면 아내의 모임이 '두 시 계'라는 이름까지 달리게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여자들에게는 흔하지 않은 특별한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툭하면 술자리에 그것도 새벽 두 시를 넘기는 경우가 다반사이니 그것이 특별한 일도 아닌 것이다.
글을 쓰고보니 그렇다. 맞벌이 부부로서 육아(양육)와 가사를 합리적으로 분담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진데 아이와 놀고 집안일을 좀 하고 아내가 늦은 모임을 갖도록 스케줄을 조정하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으쓱거리다니....

Posted by 봄여름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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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뭐 있어?'
오늘 이 표현을 언듯 보다가 곰곰히 생각해본다. 

'인생.'
산다는 것. 존재하는 것이 아닌 사는 것. 능동적으로 살아 내는 것.

'뭐 있어.'
정말 무슨 의미로 사는 지도 모르면서 앞으로 올 미래 인생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지금 당장 흥청망청 (돈,시간)쓰고 죽자는 말이 아니다.
나중에 더 풍족하게 살기위해 평생을 궁색하게 살기만하다가 죽는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중에 행복해지려고 가족을 포기하고 돈벌이에 희생당하는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살아계셨으면 정말 잘해드릴텐데...'라는 거짓말을 얼마나 더 해야하는가.
남을 도울 수 있을 정도의 부자가 되는 게 꿈이라던 어떤 놈은 평생 한 번도 남을 돕지 못하고 있다.
죽는 순간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닐 것이다. 죽는 순간 행복한 사람이 가장 행복한 것이 아닐 것이다.
행복한 순간순간이 가장 많은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필연적으로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리라.

지난 밤, 아들이 '100이야기' 읽어달라며 졸라대는 것을 못하고 그냥 잔 것이 내내 후회가 된다. 나도 아들도 너무 졸렸지만...그런 기회는 우주 역사상 단 한 번 뿐인 것을.
 
우리 힘을 내서 매순간 최대한 행복하기로 하자꾸나.
Posted by 봄여름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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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신공양

카테고리 없음 2010. 6. 11. 10:45

소신공양.

  뜬금없지만 결론부터. 소신공양의 원조이며 궁극은 바로 예수가 아닌가 싶다. 그가 죽음으로써 온 인류가 죄에서 구원받을 길을 열었으므로 죽음의 명분(크기?)으로 이보다 거창한 것은 없다.

문수스님이 스스로 몸에 불을 놓고 죽은 이른바 소신공양 소식을 듣는다. 공중파에서 애써 외면하는 이 전환기적 사건을 프레시안에서 기사로 접한다.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난다.

지율스님이 그깟(!) 도롱뇽 때문에 단식하며 죽음 직전에 가는 모습을 보며,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고는 낙동강변을 따라 보행하며 사진찍기에 열심인 그분을 보며 아내에게 그랬다.

지율스님같은 분이 진짜 예수(의인)를 닮은 것같다

  또 한 명, 예수를 닮은 사람이 죽었다. 자기가 가진 생명을,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내던지며 다른 연약한 생명들을 구하라 하셨다. 이타심의 극단일까... 해탈의 경지일까... 상상조차 부끄러운 그 깊은 마음은 무엇일까. 다 헤어리지 못할뿐더러 곡해할까 염려되는 그 뜻은 무엇일까.

한 우주. 한 생명. 

남은 모든 것들에게는 그저 한 생명의 사그러짐이지만 그 생명에게는 온 우주가 닫히는 절대적 사건이리라.

스스로는 절대 바뀌지 않을 2MB에게 마지막 말씀을 하셨다. MB가 스스로 바뀌지 않을 존재라는 걸 문수스님도 당연히 아실 것이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 것인가를 고민해본다...라고만 하면 안된다. 해야지.


Posted by 봄여름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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